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고타이 칸 (문단 편집) == 생애 == 아버지 칭기즈 칸의 정복 사업을 이어 받았는데 그의 치세에 몽골 제국은 역사상 가장 서쪽 끝[* [[바투]]의 유럽 원정]과 남쪽 끝에 도달했다. 물론 중국, 이란, 중앙 아시아도 연거푸 [[박살]]내고 다녔다. [[원나라]]가 건국된 후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하지만 반면 [[애주가|술을 매우 좋아해서]] 건강에 문제가 있기도 했다. 술 좋아하는 것도 내력인지 그의 아들 중에서 술 때문에 아비보다 일찍 죽은 자식도 있었다. 한 튀르크인이 무슬림을 싫어하여 꿈에서 칭기즈 칸이 나타나 무슬림을 다 죽이라 명하셨다고 오고타이 칸에게 호소했는데 오고타이는 그에게 '''선대 칸께서는 몽골말밖에 못 하셨으니[* 당시 몽골 땅의 귀족이면 [[튀르크어]]는 어릴 때부터 기본으로 배우는 것이었지만, 칭기즈 칸은 아버지가 독살당한 후 젊은 시절엔 죽도록 고생만 한 흙수저였기에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전직 나이만 부족 책사였던 타타통아가 칭기즈 칸의 휘하에 들어온 후 칭기즈 칸 일가에게 위구르 문자를 가르쳐봤지만, 정작 칭기즈 칸은 가족 중 유일하게 [[샤를마뉴|터득하지 못하고 문맹으로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칭기즈 칸이 창제한 [[몽골 문자]]는 위구르 문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건 그냥 개꿈이니라.'''라는 말로 침묵시켰고, 후에 송나라인들이 인형극으로 무슬림을 까려고 하자 '''송나라인 노예를 부리는 무슬림은 있어도 무슬림 노예를 부리는 송나라인은 없더라. 그러니까 정신승리는 그쯤 하지?'''[* 노예로 안 부리는 게 나은 거 아닌가 할 수 있지만, 중세의 노예란 근세 이후의 노예와 달리, 외국인을 인신매매로 사 와서 하인으로 부리는 주인의 권세를 나타내는 사치품 취급이었다. 따라서 아예 [[짐승|하인 취급조차 안 해줬다]]는 그런 얘기다.]라는 말로 침묵시켰다. 하지만 버로우시킬 뿐 죽인 인물은 없었다. 오고타이 칸의 시대에는 유럽과 중앙아시아보다는 송나라 정벌에 힘쓴 시대이니만큼 한족들을 견제하는 동시에 무슬림들을 끌어들여야 했으니 정치적으로도 볼 수 있는 일화다. 하지만 다른 몽골족 지도자들보다 온화한 건 사실이다. 보통은 칭기즈 칸이 셋째인 오고타이를 칸으로 임명하자 다 따랐다고 하지만 [[원조비사]]에서는 [[주치(몽골 제국)|주치]]의 핏줄이 문제가 돼서 둘째인 [[차가타이]]와 대립하게 되자 그나마 조정자가 될 수 있는 셋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임명했다고 한다.[* 주치는 칭기즈칸의 장자이기는 했으나 친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었다. 칭기즈 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치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불발된다. 차가타이는 성정이 격하고 주치와의 대립이 심했기에 칭기즈 칸은 아예 후계자 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온화한 오고타이가 후계자가 된다.] 칭기즈 칸은 [[1227년]]에 [[서하]] 원정 중 사망했고, 칭기즈 칸의 첫째 아들 주치는 그전에 죽었다. 칭기즈 칸 사후 2년간 막내 동생이 섭정을 했지만 [[1229년]] [[쿠릴타이]]에서 대칸에 올랐다. 둘째 형 [[차가타이]]는 오고타이 칸을 지지했다. 말자 상속제 때문에 주치와 차가타이에게는 승계권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김호동, “칭기스 칸의 자제분봉(子弟分封)에 대한 재검토 -『집사(集史)』〈천호일람(千戶一覽)〉의 분석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연구》 9(2004)를 참고하면 알 수 있다. 오고타이 칸 시절 중요한 전장 중에 한 곳은 중동 지역이었다. 칭기즈 칸이 자근자근 밟아놨던 [[호라즘 왕조]]의 왕자 [[잘랄 웃 딘 밍부르누|잘랄 웃 딘]]이 중동 지역에 돌아와 깽판을 치고 다니자 오고타이 칸은 몽골군을 보내 중동 지역을 침공하게 한다. 이 군세는 잘랄 웃 딘을 제압하고 [[캅카스]] 지역까지 진출하여 이 지역 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든다.[* 한편 잘랄 웃 딘은 1231년 쿠르드 계열의 아미르에 의해 피살당하며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1230년 무렵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 전선에 집중한다. [[산서성]]에서 [[툴루이]]와 합동작전으로 금군의 주력을 쓸어버린 뒤[* 이때 금나라의 마지막 명장 중 하나인 [[완안진화상]]이 충효군이라는 군대를 조직해서 몽골군에 맞섰다. 완안진화상은 처음에 도회곡이라는 곳에서 [[수부타이]]를 위시한 몽골군을 패퇴시키는 등 맹위를 떨쳤으나 결국 툴루이의 계략에 말려서 한 곳으로 몰린 끝에 최후의 항전을 벌이나 참패하고 몽골군에 자진 출두한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당당함을 유지했고 또한 투항을 거부했다. 비록 투항을 거부했으나 그의 당당한 태도에 몽골 장수들이 모두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완안진화상이 아무리 고군분투했다고 하더라도 전황을 뒤집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미 오랜 전쟁으로 금나라의 정예 전력인 기병 전력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기병 전력을 충원해 줄 만주 지역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에 한번 소진되면 다시는 복구가 불가능 했다. 결국 완안진화상의 충효군은 보병 위주였고 이들 만으로는 야전에서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금나라의 수도인 [[카이펑|개봉]]을 포위한다. 전황이 유리하게 흘러가자 오고타이 칸은 전선을 떠났고 이후 몽골군은 [[남송]]의 지원을 받아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금나라가 망하고도 [[곽하마]]라는 장군이 저항했다고 한다. 곽하마는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결국 힘이 다하자 스스로 불에 들어가서 분사한다. 곽하마는 활을 매우 잘 쐈다고 하며 서하와의 전쟁에서 맹활약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수백 발의 화살을 쏴 적을 맞혀 몽골군 장군들이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남송이 개기자 1235년부터 남송을 침공하여 이후 40여 년에 걸쳐져 벌어질 남송과의 긴 전쟁을 시작한다. 요동 지방의 거란족 반란군들을 진압하던 와중에 불똥이 튀어 1231년 고려에 쳐들어오기도 했다. [[여몽전쟁]] 참조. 남송과의 전쟁이 막 시작되는 무렵인 1236년 유럽 쪽에도 [[바투]]가 이끄는 원정군을 보냈다. [[캅카스]] 지역과 남부 [[러시아]] 지역을 강타한 바투의 원정군은 동유럽에까지 나타났다. 1241년 [[레그니차 전투|폴란드]]와 [[모히 전투|헝가리]] 전역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몽골군은 오고타이 칸에게 남은 유럽 지역을 정복할 수 있게끔 허가를 받았다. 몽골군은 [[오스트리아 공국]]에 처들어가려고 했으나 원인 미상의 이유로 되돌아갔다. 오고다이 칸이 비슷한 시기에 죽어 몽골의 전통에는 황제가 죽으면 황족이 모두 모인 다음에 쿠릴타이를 열어 그 다음 황제를 선출해야 했기 때문이였다는 가설이 전통적인 추측이였으나, 현재는 부정하는 학설도 꽤 많다.[* 사실 바투와 그의 부관들은 유럽 원정을 이어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원정대의 실질적인 지휘자였던 [[수부타이]]가 바투에게 다소 협박에 가까운 말을 하면서까지 귀환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의견에 따라 귀환을 선택했다고 한다. 대신 타협책으로 귀환길을 발칸반도를 경유하는 길로 잡아 약탈전을 계속 수행했다.] 유럽 입장에선 그야말로 '''유럽의 구원자'''인 셈. 폴란드와 헝가리 다음 타겟은 바로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다만,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레그니차 전투]] 직후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마이센(독일)|마이센]]후국의 수도인 마이센을 약탈한 후 파괴하거나 다른 제후국인 [[보헤미아 왕국]]에 처들어갔다가 격퇴당한 적은 있다.] 오고타이 칸은 인도 방면에도 군대를 보냈지만 일부 지역을 속국으로 두었을 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미 대제국이었던 몽골의 입장에서 큰 성공이 아니라는 뜻이며, 속국으로 두게 된 지역은 [[라호르]] 일대의 소국들로 합치면 10만제곱키로가 넘는 현 대한민국 영토에 비등한 지역을 속국으로 둘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